공동체기록관
공동체기록관 소개
소소한마을전시회
마을공동체공간
마을공동체활동
금천사람들
마을여행

> 공동체기록관 > 금천사람들

금천사람들

2020휴먼스오브금천-노금숙 살구여성회 활동가 인터뷰

글쓴이 : 마을관리자 작성일 :20-12-09 12:14 조회 : 373회 댓글 : 0건

본문

0a7ba96fad0c6a0997d2692595ecc8ed_1607483544_9522.jpg 


인생의 자랑스러운 순간은 살구에서

노금숙 회장, 영어선생님으로 시작된 뜻밖의 봉사 여정

 

노금숙 회장과 살구여성회의 인연은 뜻밖에 맺어졌다. 수업을 듣겠다고 찾아온 노금숙 회장에게 오히려 살구여성회가 수업을 부탁하게 된 것. 그렇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 살구여성회와의 인연에서 노금숙 회장은 보람을 느끼고 생에 자랑스러운 순간을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다. 1991년부터 긴 세월 함께 해 준 노금숙 회장, 그녀의 인생이 살구여성회를 만나 만개했던 순간들을 함께 회상해 보았다.

 

수강생으로 찾아와 선생님으로

 

노금숙 회장님은 어떤 계기로 살구여성회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됐나요?

노금숙 회장 : 제가 경북 구미에서 살다가 금천으로 이사를 왔어요. 그리고 제 직업이 영어 교사였어요. 당시 아이들 키우느라 일을 못 하는 상황이었지만 언젠가 다시 영어 교사로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죠. 그러던 중 집에 신문 배달이 왔는데 신문 사이에 살구여성회를 소개하는 전단이 끼워져 있는 거예요. 그때가 1991년이었죠.

전단을 읽어보니 중급영어를 가르쳐 준다더라고요. 영어 강사는 한신대학교 김주숙 교수로 되어있고요. 교수님이 직접 중급영어를 가르쳐준다고 하니 굉장히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물어 살구여성회로 찾아갔죠. 중급영어 신청하러 왔다고 하니 교재를 보여 주시는데 중학교 1학년 알파벳 가르치는 부분을 보여 주시는 거예요. 너무 뜻밖이죠. 저는 대학원에서 영어교육까지 전공했는데, 알파벳을 배울 순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영어 교사를 했던 사람이고, 중급영어라고 해서 왔는데 알파벳을 배우는 반에 들어갈 수는 없다.”라고 말했죠. 그때 곁에서 제 말을 듣고 있던 정외영사무국장이 영어 교사까지 하셨다고요?”라면서 저를 붙잡은 거예요. 자원봉사 활동을 부탁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수업을 들으러 오셨다가 수업을 하게 된 사연이 재미있습니다. 당시는 살구여성회 초창기였는데요. 수업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노금숙 회장 : 어른들의 배움의 욕구가 굉장했죠. 수업은 한글, 영어, 수지침, 한문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주민센터에서 진행하는 강좌나 문화센터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살구여성회가 배움을 제공하는 단체로써 흔치 않은 일을 한 거죠.

 

진심으로 계획한 여성 일자리 창출

 

아무래도 초창기부터 함께 하신 분이라 살구여성회에서 노금숙 회장님을 각별하게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노금숙 회장 : 제가 어려운 시기에 회장직을 맡았기 때문에 다들 고마워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살구여성회의 명맥을 유지하느라 노력했고, 어떻게든 살구여성교실과 따뜻한 밥집 두 개 사업만이라도 중단없이 이어가느라 애썼습니다. 그렇게 운영하다 보니 좋은 활동가들이 살구여성회에 모여들었고, 서울시여성센터에서도 많이 도와주셨죠.

 

살구여성회 활동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노금숙 회장 : 양성평등 교육과 마술교육 진행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시흥에 사는 지인을 통해 마술교육을 진행했는데, 그때 교육받은 여성들이 초등학교 방과후교실에 일자리를 얻어 경력단절을 해소할 수 있었죠. 사실 처음엔 마술에 속임수가 많아서 취직이 어려울 줄 알았어요(웃음).

그리고 제가 영어 교사로 일을 하다가 다시 재기하려고 애쓴 경험이 있어서 여성 일자리 창출에 특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다만 살구여성회에서 기존에 해오던 봉사활동을 유지하느라 제가 꿈꾸던 만큼 여성 일자리 창출을 많이 이뤄내지 못한 데 아쉬움이 남긴 합니다.

 

봉사활동 중 따뜻한 밥집의 경우 초창기에 자리잡힐 때까지 운영이 어렵기도 했고, 활동가들도 힘들어했다고 들었습니다.

노금숙 회장 : 그렇죠. 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따뜻한 밥집에서 일하는데 꼬박 이틀은 매여 있어야 하고, 식사시간 후에는 설거지나 소독이 굉장히 힘들거든요. 봉사하겠다는 마음이 투철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죠. 그렇게 힘든 일인데도 어떻게든 이끌어 갔다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힘든 활동이 있었음에도 살구여성회가 30년째 꿋꿋하게 이어진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노금숙 회장 : 시대가 꼭 필요로 했던 것을 살구여성회의 여성들이 봉사 정신으로 지역사회에 제공했기 때문이죠. 살구여성회에 참여한 활동가 중 몇몇은 통솔력이 뛰어나고, 누구는 실행력이 뛰어나고, 누구는 아이디어가 좋은데 각자의 특성이 모여 시대가 원하는 바에 응답한 거라 생각합니다.

 

활동가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노금숙 회장님은 왕성하게 활동하시다가 살구여성회 활동을 중단하셨어요.

노금숙 회장 : , 제가 한때 구의원 출마를 준비하느라 그만뒀습니다. 모두가 남자인 구의원의 세계에서 여성도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공천이 잘 안 돼서 구의원을 못 했습니다. 대신 초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다시 일하면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살구여성회의 중심에서 활동도 해 보시고, 원하던 영어 교사 일도 다시 해 보셨고, 지금은 한 발짝 물러서서 살구여성회를 응원하고 계신데요

노금숙 회장님은 살구여성회가 어떤 단체로 남길 기대하세요?

노금숙 회장 : 이제는 어르신들 식사 제공하는 급식소 역할을 교회에서 맡기도 하니까 기존 사업을 유지만 하는 대신 다양하게 뻗어 나가야겠죠. 그리고 시대가 달라졌어도 아동들을 위한 공간은 꾸준히 필요하므로 살구지역아동센터를 중심으로 더 넓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노금숙 선생님께 살구여성회는 어떤 의미인가요?

노금숙 회장 : 내가 사는 지역을 발전시킨다는 단체, 그리고 그곳에 내가 소속돼 힘을 보탤 수 있어 행복한 곳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분이 살구여성회를 알고 응원해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노금숙 회장님 인생에 가장 반짝였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노금숙 회장 :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가 대학 다니면서 과대표도 하고, 이런저런 활동을 참 많이 했어요. 연극에도 심취했고요.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참 즐겼는데 그게 살구여성회에서 다시 만개했다고 느낍니다.

사실 처음 중급영어를 배우겠다고 살구여성회를 찾아갔을 때 오히려 제게 수업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거절했어도 됐거든요. 그런데도 저는 수업을 맡았고, 봉사하고, 회장직도 맡았어요. 그렇게 다양하게 활동하면서 생명력을 느끼고 자랑스러운 순간을 만날 때 저는 항상 반짝였던 것 같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