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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휴먼스오브금천-박은실 살구여성회 활동가 인터뷰

글쓴이 : 마을관리자 작성일 :20-12-09 12:27 조회 : 231회 댓글 :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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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함께 배운 용기과 연대

박은실 이사, 수강생과 함께 반짝인 10

십 년 넘게 살구여성회의 터전을 다져온 박은실 이사. 이제 와 돌이켜보면 위태로울 듯하다가도 우뚝 서고, 고단하다고 느낄 무렵엔 어디선가 꽃망울이 터지는 주기가 순환하며 살구여성회가 성장해왔다고 박 이사는 회상한다. 배고픈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고 미처 한글을 배우지 못한 여성들의 글눈을 틔웠던 그녀의 저력은 아마도 우직한 책임감일 것이다. 마치 여린 과육 속 단단한 씨앗이 자리 잡은 살구처럼 말이다.

 

 

묵묵한 책임감으로 성장한 30

 

살구여성회가 2021년이면 30주년입니다. 30년 세월 속 박은실 이사님이 동행한 기간이 무려 십 년이 넘습니다. 십 년 넘게 봉사하며 느낀 바가 많으실 텐데요. 긴 세월 살구여성회가 지속된 힘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요?

잡초 같은 생명력이라고나 할까요(웃음)? 사실 십 년 가까이 봉사하면서 고비라고 느낀 적이 몇 번 있었어요. 지금은 정부에서 다양한 지원을 하고 복지정책의 수준이 높아졌지만, 30년 전 살구여성회가 설립됐을 무렵엔 정말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정부에 무언가를 기대하기보다 구성원마다 책임과 사명이 확고해야만 단체가 운영될 수 있었죠. 또 그만큼 사람 간의 따뜻한 정을 많이 느꼈고요. 그러한 책임감과 사명, 사람 간의 온기가 살구여성회를 지속하는 힘이 아닐까 합니다.

 

 

살구여성회는 복지라는 단어가 매우 생소할 무렵 금천구에서 시작된 지역 여성 단체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여전히 살구여성회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쩌면 앞서 말한 것처럼 책임감과 사명이 강하고 주어진 바를 묵묵히 맡아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구여성회 구성원들은 그동안의 이력과 공로를 내세우기보다 조용히 봉사하고 지역 안에서 도란도란 살아가며 성취감을 느끼는 편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홍보하는 데 익숙한 시대의 변화와 달리 우리들의 묵묵한 봉사성향 때문에 덜 알려졌다고 생각합니다.

 

글눈을 틔우고, 틔워주는 행복

 

 

박 이사님은 살구평생학교에서 오랫동안 한글반을 운영하셨습니다. 처음 한글반에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교편을 잡은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세요?

우리는 같은 나라, 같은 지역에 살아도 사는 방식이나 환경이 제각각입니다. 제가 한글반을 시작할 무렵 수업을 들으러 오셨던 어르신 중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노곤한 상태로 오는 분도 계시고, 전업주부로 살림만 하다 오신 분도 계시고 모두 상황이 제각각이었어요. 그래서 같은 내용을 알려드려도 받아들이는 게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정만으로 수업을 끌어가기보다는 수강생 한 분 한 분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애쓰던 시절이었습니다

 

.

그런가 하면 한글을 가르치면서 기억에 남는 수강생도 많을 것 같습니다.

, 아주 많지요.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글을 배우기 한참 전 구로공단에서 열린 가요제에 참가했는데 2등을 한 거예요. 그때 유명한 작곡가 선생님이 그분 노래를 듣고는 찾아오셔서 혹시 가수 할 마음이 없냐고 물으셨다고 해요. 그때 가수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는데, 가사를 못 읽고 글 읽을 일이 많아질까 봐 덜컥 겁이 나셨나 봐요. 결국, 한글을 모른다고 털어놓을 수가 없어서 못 하겠다고 하셨대요.

 

 

정말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그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배우러 살구여성회를 찾아오셨네요.

그렇죠. 늦게나마 글을 배운다고 하니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이 많이 응원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이 살구여성회를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유명한 가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늦게나마 배움을 시작하신 데 반가움이 동시에 들었죠.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제게 선생님!”하고 전화가 옵니다. 그럴 때면 보람을 많이 느끼고 세상의 아름다운 부분에 눈을 뜨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살구평생학교의 문해교육을 통해 학력인증을 받는 분들이 많나요?

지금은 매해 평균 4명씩 졸업장을 땁니다. 졸업장이 시험만 잘 본다고 되는 게 아니라 출석 일수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꾸준히 수업에 참석하고 시험까지 통과하신 분들이 해마다 4분 정도 계시고, 그 외에 수업을 듣는 분들은 훨씬 많습니다. 늦게나마 학업을 시작해 결실을 맺으려는 분들이 많기에 저 역시 힘든 줄 모르고 이 자리에 있는 거겠죠?

 

 

현재 살구평생학교에는 한글반을 비롯해 컴퓨터반, 영어반, 서예·채색화반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수업이 이루어지지만 여기서 더욱 학교를 확장할 생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예전에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주로 살구평생학교의 학생이었다면 지금은 젊은 여성과 장애 여성도 있습니다. 수강생들의 연령 폭이 넓어지고 학교의 문턱이 편안해졌다는 데서 이미 의미 있는 확장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나와 살구, 그 반짝이는 연대에 대하여

 

폭넓게 학생을 맞이하고 가르침을 전하는 박 이사님의 삶이 참 고아하게 다가옵니다. 가족분들은 박 이사님의 활동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족들은 저를 매우 자랑스러워합니다. 제 남편은 어디서 좋은 음식이나 간식거리가 생기면 학생들과 나눠 먹으라고 넉넉히 챙겨주곤 합니다. 그런 소소한 마음이 제겐 큰 응원이죠.

 

 

그렇다면 박 이사님 스스로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순간은 언제라고 생각하세요?

오늘이요. 10년 가까이 살구여성회에 몸담은 내내 저는 매일 찾아오는 오늘이 항상 반짝인다고 느꼈습니다. 먼 옛날 공부란 남성의 것, 살림은 여성의 것으로 강요당한 시절이 있었죠. ‘여자가 왜 공부를 해야 하나.’, ‘여자가 공부해서 어디에 쓰나.’와 같이 낡은 인식과 사회적 분위기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분들이 늦게나마 살구여성회를 찾아오실 때, 그리고 그분들을 맞이해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해낼 수 있음을 증명할 때 저와 수강생들은 함께 행복했고 함께 반짝였습니다.

 

 

노력하고 봉사한 결과가 확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 아름답고 존경스럽습니다.

, 저도 제가 존경스럽습니다(웃음). 그래야 자신감 있게 수업하고, 수강생분들께 봉사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스스로를 존경하려고요.

 

 

박 이사님은 앞으로 살구여성회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길 기대하시나요?

살구여성회에 보다 신선한 바람이 불었으면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더욱 많은 분이 활동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단체가 되길 바랍니다. 이름은 여성회지만 남성분들도 환영합니다(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수강생분들의 인식이 변화했으면 좋겠습니다. 늦게라도 공부를 한다는 건 응원받아야 할 멋진 일인데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분들이 많아요. 좀 더 당당해지셨으면 합니다. 얼마 전에는 글을 배운 수강생 한 분이 이제 병원에 가서 자기 이름을 쓸 때 긴장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쓸 수 있어 참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배우니까 당당해지는 겁니다. 지금보다 더 당당하게, 더 뿌듯하게, 더 행복하게 공부하고 성취하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좋은 일들을 많이 해오셨고, 살구여성회의 영향을 받은 타 지역 단체들도 무수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살구여성회와 지역사회를 바라보는 감회를 여쭤볼게요.

살구나무 하나에서 씨앗이 퍼지고 또 퍼지며 좋은 단체들이 많이 생겼다고 느낍니다. 어떤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지역단체가 30년을 지속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매우 기념비적이고, 살구여성회의 활동이 긍정적인 영향을 퍼뜨렸다는 데 만족합니다. 신선한 변화를 만들되 지금처럼 행복을 영그는 살구여성회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긴 시간 인터뷰를 마치고도 박은실 이사의 얼굴에서는 포근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마치며 살구여성회가 배움의 문턱을 넘은 이들에게 진정 전하고 싶었던 건 한글과 더불어 이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갈 용기와 따뜻한 연대감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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